여행 3주 전부터 선크림을 가지런히 가방에 넣어두었죠? 그 선크림은 마치 하얗고 무심한 눈처럼 밤마다 당신의 수면을 지켜봅니다. ISFJ에게 여행은 탈출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사태'라는 적군과 싸우는 고도의 군사 작전입니다. 당신은 현실이 당신의 기억 지도에서 1밀리미터라도 벗어날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당신은 세상을 보러 떠난 게 아닙니다. 낯선 땅에서도 여전히 통제권을 쥐고 있을 수 있는지 확인하러 간 것뿐입니다.
당신의 남의 기분을 먼저 챙기는 본능은 이미 출발 전부터 인신 공여를 마쳤습니다. 당신은 정작 관심도 없는 맛집들을 몇 달 동안 조사했습니다. 오로지 동행인이 좋아할 것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요. 여행지에서 당신은 유령과 같습니다. 아침 조식 뷔페를 배회하며 타인의 토스트가 정확히 원하는 농도로 구워졌는지 확인하는 무급 가이드가 됩니다. 당신은 타인의 행복을 수호하는 침묵의 종이며, 정작 당신의 식욕은 어두운 그늘 속에서 죽어버렸습니다.
낯선 도시의 호텔 방, '이불킥'보다 무서운 침묵
깊은 밤, 도쿄나 파리 혹은 런던의 호텔 방입니다. 발에는 물집이 잡혔고 영혼은 바짝 말라버렸습니다. 당신의 이성적인 판단은 머릿속에서 비명을 지릅니다. 이 박물관은 정말 시간 낭비였다고, 당신의 동행인은 너무나 이기적이라고요. 당신은 스마트폰을 듭니다. 장문의 메시지를 적기 시작하죠. 당신이 얼마나 지쳤는지, 지금 이 여행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말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 불안이 차가운 뱀처럼 당신의 척추를 타고 올라옵니다. 당신은 미래를 봅니다. 이 메시지 한 통이 불러올 다툼, 남은 사흘간의 냉전,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뒤 사람들이 당신을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수군거릴 그 광경을 말입니다. 당신은 범죄 흔적을 지우듯 그 진심들을 하나씩 삭제합니다. 당신이 그곳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를 허공으로 날려버립니다. 그리고 당신이 보낸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ㅎㅎ 괜찮아요! 내일은 몇 시에 나갈까요?" 호텔 에어컨 소리가 갑자기 당신을 비웃는 것처럼 들립니다.
기억: 여행의 상처들로 가득 찬 박물관
당신의 기억은 파리의 에펠탑보다 2017년 어느 환승역에서 겪었던 끔찍한 당혹감을 더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 기억은 기생충처럼 현재의 기쁨을 갉아먹습니다. 공항 터미널에 발을 들일 때마다 당신의 기억은 과거의 모든 지연, 모든 분실, 모든 불친절했던 눈빛들을 되감기합니다.
당신은 여행 내내 이 유령들로부터 도망치려 애씁니다. 여권을 열 번씩 확인하고, 비행기 이륙 네 시간 전에 게이트에 도착합니다. 이건 '준비성'이 아닙니다. '빙의' 된 것입니다. 당신은 촘촘한 일정표로 성벽을 쌓아, 혹시라도 벌어질 수 있는 불안들을 막으려 합니다. 하지만 진짜 공포는 일정표를 지키려다 당신 자신도 지켜야 할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점입니다.
최종적인 소멸
ISFJ 여행자의 가장 극단적인 공포는, 여행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당신이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져 있다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에는 웃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사진이 500장쯤 담겨 있겠지만, 정작 당신은 그 나라 음식 맛이 어땠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타인의 휴가를 완벽하게 수호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존재를 바쳤습니다.
당신의 이성적인 판단은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기념품 가게의 제단 위에 세워진 순교자였다는 사실을요. 마찰 없는 완벽한 여행을 위해 영혼을 팔았다는 것을요. 그리고 가장 비참한 건, 아무도 당신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당신이 피 흘려 지켜낸 평화를 누리기에 너무 바빴으니까요. 당신은 이제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허구 가득한 메시지들을 들여다보며, 다시 한번 희생 제물이 될 다음 여행을 기다립니다. 이 굴레는 완벽하고, 도망칠 방법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