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입니다. 명절날 친척들의 잔소리를 '팩트'로 제압하고 방으로 들어와 혼자 앉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말 한마디로 사람을 압도한다", "역시 똑부러진다"라고 칭송하거나 혹은 두려워하죠. 나 역시 겉으로는 "나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이라서 저런 무식한 소리들을 참을 수 없다"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이 어둠 속에서 거울을 보면, 그곳에는 유능한 관리자가 아니라 아주 비겁하고 잔인한 '조종자'가 서 있습니다. 나는 오늘 친척들의 무지를 비웃으며 승리감을 맛보았지만, 사실 나는 그 승리를 위해 내 곁에 남아있던 실낱같은 '정(情)'을 내 손으로 잘라냈습니다.
나의 가장 어두운 면은 내가 사람들의 동기를 완벽하게 분석하고 있다고 믿는 오만함에서 나옵니다. 나는 명절날 나에게 "취업은 했냐"고 묻는 작은아버지의 질문이 걱정이 아니라 '비교를 통한 자존감 상승'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그렇게 타인의 선의를 악의로 번역해버리면, 나는 그들을 공격할 수 있는 정당한 명분을 얻게 되죠. 나는 '이해받지 못하는 객관적인 관찰자' 카드를 꺼내 듭니다. "아무도 내 진심을 몰라줘, 나는 그저 바른말을 했을 뿐인데"라며 스스로를 피해자로 둔갑시킵니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그들을 조종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상처받은 척함으로써, 그들이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그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는 고도의 심리 전술을 쓰고 있었던 겁니다.
자기 파괴적인 '승리'의 중독
왜 나는 매번 이런 식일까요? 왜 나는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기회마다 그 관계를 전장으로 만들어버리는 걸까요? 그것은 내가 '통제권'을 잃는 것을 죽기보다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깊게 연결된다는 것은 나의 약점을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고, 그것은 나에게 곧 '패배'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상처를 줍니다. 내가 버림받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을 밀어내는 것이죠. 나는 유능함이라는 칼을 휘둘러 주변을 정리하고, 그 적막한 고독 속에 홀로 서서 "역시 나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라며 자기만족에 빠집니다. 이것은 지독한 자기 파괴입니다.
나는 특히 나의 '책임감'을 무기로 삼아 주변을 가스라이팅 합니다. "내가 우리 집안을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처리해?" 이런 말들 뒤에 숨어서 나는 주변 사람들의 입을 막아버립니다. 그들이 나에게 다가오려 할 때마다 나는 나의 '희생'을 성벽처럼 쌓아 올립니다. 그렇게 나는 유능한 순교자가 되어, 아무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게 만듭니다. 사랑받기보다는 숭배받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관찰자라는 허울 좋은 핑계
나는 스스로를 관찰자라고 부르지만, 사실 나는 감정적인 미성숙아일 뿐입니다.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그 예리한 촉을 오직 공격용으로만 사용하죠. 상대방이 가장 아파할 지점을 정확히 골라내어 논리라는 이름의 소금을 뿌립니다. 그러고는 "나는 중립적이다", "나는 객관적이다"라고 자위합니다. 이것이 나의 가장 비겁한 자기 합리화입니다.
오늘 밤, 나는 내가 분석해온 그 수많은 데이터가 정작 나 자신의 외로움은 단 1그램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머릿속은 수술하듯 파헤치면서, 내 마음속의 구멍은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내 삶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왔지만, 정작 그 삶 안에는 '나'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는 오직 목표를 위해서만 존재했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마주친 사람들을 장애물로 취급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만든 이 완벽하고 효율적인 지옥 안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습니다.
새벽의 청산
곧 해가 뜨면 나는 다시 완벽한 가면을 쓰고 세상으로 나갈 겁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부하 직원들을 독려하고, 상사에게는 명쾌한 보고서를 올리겠죠. 그리고 명절 내내 나 때문에 상처받은 가족들의 얼굴은 기억에서 지워버릴 겁니다. "그들이 약해서 그런 거야"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요.